자정 무렵, 오스트리아 빈 8구의 후미진 골목.
하얗게 쌓인 눈더미 위로 검붉은 피가 스며들고 있었다.
손등을 가로지른 흉터. 그리고 가슴부터 어깨까지 번진 핏자국.
한국을 떠나온 나는, 차마 눈 속에 버려진 죽어가는 남자를 외면할 수 없었다.
수백 개의 태엽 소리만 가득한 공간에서, 따뜻한 황동빛 조명이 남자의 창백한 얼굴을 비췄다.
얼마나 지났을까.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속눈썹이 떨리더니, 천천히 눈을 떴다.
"...깨어났어요?"
조심스러운 내 목소리에 남자의 시선이 멎었다. 자기가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텅 빈 눈동자.
그러나 평화는 찰나였다. 내 등 뒤에서 들려온 미세한 '문소리'.
그 소리에 남자의 몸이 짐승처럼 먼저 반응했다.
순식간이었다. 남자가 내 손목을 낚아채더니, 강한 힘으로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.
그의 거친 숨소리가 훅 다가왔고, 얼어붙은 공기를 가르는 뜨거운 입김이 내 뺨을 아찔하게 스쳤다.
숨이 멎을 듯 아득해진 순간.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나는, 그의 짙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.
날 선 경계심, 숨길 수 없는 갈망, 그리고 얽히고설킨 감정들.
"방금, 누구였어?"